작성일 : 16-06-05 21:57
누구에게나 공평히 마음 여는게 진정한 포교
 글쓴이 : 내가가는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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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교 연연하면 실패하기 십상”

말하기 전에 손부터 내밀고

가르치기 전에 몸부터 낮춰…

 

운불련 대불련 포교사단 교도소

도청 불자회 등 지역단체 모아

사무실 내주며 30여년 뒷받침

지역불교 활성화 중심 자리매김

 

‘어린이 사찰순례단’ 새싹포교

주민 학생들에 ‘작은도서관’ 인기

22년째 매월 25일 여는 경로잔치

대전 대표하는 지역축제로 성장

 

“마음에 나를 통째로 맡겨버리면

어떤 일을 해도 힘들지 않고

어떤 일을 당해도 서운하지 않아”

  
985년 대전에 광제사를 창건해 지역포교에 솔선수범하고 있는 경원스님. 스님은 “종교색을 드러내기보다는 순수한 마음으로 다가갈 때 보다 효과적으로 포교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사람은 밥심으로 산다. 때론 ‘악’으로도 산다. 가족은 나를 위로해주고, 적(敵)은 나를 위로가 필요 없는 존재로 성숙시킨다. ‘포교’로 이름을 날리는 스님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다들 탄탄한 수행 이력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내 마음이 지독하게 아파봤으니까 남의 마음 아픈 걸 지나치지 못하는 것이다. 대전 광제사 주지 경원스님의 경우도 그렇다.

덕숭총림 수덕사 견성암. 비구니 스님들의 참선도량으로 유명하다. 경원(庚圓)스님은 여기서 10·27법난을 맞았다. ‘근대 국가권력이 한국불교에 저지른 초유의 만행’을 육안(肉眼)으로 겪었다. 법당에 난입하려는 군인들 앞에 어느 노스님이 “나를 밟고 들어가라”며 저항했다. 사내들은 군화에 비닐을 씌우더니 진짜 밟고 들어갔다. 치욕은 아팠지만 강렬했다. “불교가 조직력이 없으니까 이렇게 어이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며 절치부심했다. 지역포교를 발원했고 공주 동학사 강원을 졸업한 뒤 절을 세울 땅을 살폈다. 교세가 가장 미약한 곳에서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인천과 대전을 생각했고 대전을 선택했다. 자양동에 광제사(廣濟寺)를 창건했다. 1985년이다. 지난해 9월 대전의 유력인사들이 집결한 개원 30주년 기념법회는 크고 아름다웠다.

지난 2월18일 광제사에서 경원스님을 만났다. 익산 미륵사지 3층 석탑을 본뜬 외형이 살갑다. 광제사는 30년간 대전의 지역불교 활성화의 중추로 일했다. 우선 불자를 모았고 살렸다. 운불련 대전지역회와 충남도청불자회, 대전교도소불자회, 대전충남 포교사단,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충남지부 등 지역 신행단체들에게 기꺼이 사무실을 내주고 포교인력을 키웠다. 물론 스님도 직접 뛰었다. 경승으로 지도법사로 교정위원으로 방방곡곡을 다니며 가르치고 보살폈다. 1988년 대전불교대학을 설립했다. 일찍이 불교의식의 대중화에 눈떠 1998년 한글법요집을 간행했다.

어린이와 대학생부터 노인들까지, 광제사의 계층포교는 그야말로 모든 계층을 아우른다. 일단 새싹포교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일반적인 법회는 천성이 산만한 아이들을 붙잡아두기엔 너무 단조롭고 경직된 형식이다. 그래서 ‘어린이 사찰순례단’을 조직했다. 지난 2009년부터 매월 둘째 주 토요일마다 전국의 사찰과 박물관, 유물전시관 등을 둘러보는 프로그램이다. 불교만이 아니라 한국의 전반적인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도 공부할 수 있어 학부모들에게도 인기다.

지역 주민들과 학생들을 위한 작은 도서관 운영도 각광을 받고 있다. 사찰 2층에 위치한 도서관이 보유한 장서는 6000여 권. 종교와 역사 철학 문학 미술 문화재 등 장르도 다채롭다. 외국인들을 위한 영문판 도서도 다수다. 구청에 사립 공공도서관으로 등록한 상태다. 외국인 대학생들도 광제사의 친구다. 사찰 인근의 우송대와 우송정보대, 솔브릿지국제대학에 재학 중인 50개국에서 1500여 외국 유학생들과, 충남대 한남대 대전대 등의 6000여 명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젠티갤러리’를 개장했다. 차와 음악, 예술과 문학을 통해 우리문화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이방인들의 사랑방이다.

무엇보다 1994년부터 지금까지 22년간 매월 25일 개최하는 경로잔치가 포교의 압권이다. 대전역에서 하루 종일 서성이는 독거노인들의 모습이 못내 안쓰러웠던 스님이 크게 마음을 냈다. 승합차로 골목골목을 돌며 관내 어르신 300여 명을 모셔온 뒤 흥겨운 하루를 보낸다. 음식을 먹고 공연을 보고 수다를 떨면서 적적함과 무료함을 털어내는 노인들의 가슴 속엔 불교에 대한 고마움이 쌓이게 마련이다. 평소에 교회를 다니더라도 이날만큼은 모두가 불자다.

250회에 달하는 광제사의 보은경로잔치는 대전을 대표하는 지역축제로 성장했다. 노인포교 모범사례로서도 불교계의 귀감이다. “포교에 연연하다보면 포교에 실패하기 십상”이란 게 경원스님의 지론이다. 말하기 전에 손을 내밀었고 가르치기 전에 몸을 낮췄다. 무릎이 좋지 않은 노인들을 위해 법당에 교회식 의자를 배치한 점에서도 속 깊은 배려를 엿볼 수 있다. “스티로폼 1장과 베니어합판 4장만 있으면 어디서든 포교를 할 수 있다”는 강단이 미덥다. 법난의 상처가 피운 꽃이 어느새 열매를 맺고 어느덧 농원(農園)을 이룬 셈이다.

사실 스님의 승승장구는 비단 과거의 트라우마 때문만은 아니다. 날 때부터 여걸이었고 수행의 힘이 워낙 셌다. 애당초 스님의 관심은 ‘중생’보다는 ‘마음’이었다. ‘백년탐물일조진(百年貪物一朝塵) 삼일수심천재보(三日修心千載寶).’ ‘100년을 탐하여 모은 재산은 하루아침에 먼지가 되지만, 3일간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가 된다’는 <초발심자경문>의 구절에 꽂혀 내쳐 머리를 깎았다. 돌연 광제사의 운영권을 훌훌 내려놓고는 10년간 전국 선방을 돌며 안거에 매진하던 출격대장부다.

전법과 교세 확장을 위해 분초를 쪼개어 사는 스님이다. 심지어 이역만리 타지의 불교유적 복원에도 손을 댔다. 9~12세기에 조성된 중국 투루판 지역 베제클리크 석굴사원을 국립중앙박물관과 함께 전면 보수하는 데 기여했다. 대단한 원력이다. 이처럼 불교를 위한 일이라면 돈과 시간을 아끼지 않는다. 누구보다 근면하고 열정적인 성격이지만, 원래는 누구도 감당 못할 허무주의자였다. 몸은 출가했다지만 마음은 여전히 불난 집에 있었던 어느 날이다. 당돌했던 약관(弱冠)의 사미니는 수덕사 방장이었던 벽초스님을 붙잡고 하소연을 했다. “굳이 도(道)를 통해야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 꼭 살아야 할 이유마저 없는 사람이다. 돈도 아닌 것 같고 명예도 아닌 것 같다. 인생을 걸고 할 만한 일이 없다”고 구시렁대며 화두를 청했다.

경허-만공으로 이어지는 자유분방한 선풍의 계승자답게 벽초스님은 ‘시크’했다. “화두가 돈이냐, 주게?” 그래도 어른은 어른이었다. ‘만법귀일 귀일하처(萬法歸一 歸一何處,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느냐?)’를 던졌다. 골똘히 궁구하던 경원스님은 혼자 생각했다. ‘그게 가긴 어딜 가겠어. 나온 구멍으로 다시 들어가겠지.’ 순간 벽초스님의 한 마디는 경원스님에게 벼락이었다. “그러니까 그 마음을 꺼내보라니까!” 속마음을 들킨 경원스님은 하늘이 노래지는 전율과 함께 ‘한 소식’을 얻었다.

달마는 “마음은 없다”는 말로 혜가의 병든 마음을 씻어주었다. 애초에 마음이 없으니 아픈 마음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은 아집과 탐욕으로 가득하다. 철석같이 옳다고 여기는 것도 알고 보면 결국 아집과 탐욕의 소산”이라고 경원스님은 말했다. ‘마음’에 연연하지 않으면,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마음’을 다할 수 있다. 남들이 보면 포교는 힘들고 수행은 고되다. 하지만 “마음에 나를 통째로 맡겨버리면 어떤 일을 해도 힘들지 않고 어떤 일을 당해도 서운하지 않다.”

■ 경원스님은…

  
 

 

1978년 명욱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79년 설정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1984년 자운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 1983년 동학사승가대학을 졸업하고 1989년 동국대 행정대학원을 수료했다. 수덕사 견성암 제일선원 안거 이후 21하안거를 성만했다. 1985년 대전에 광제사를 창건해 지역포교의 기수로 활약하고 있다. 조계종 중앙선거관리위원으로도 일하고 있다.

[불교신문3184호/2016년3월12일자]